친구엄마 명숙이(외전-후일담1)
나에겐 상반된 두개의 세계가 있다.
활자와 관념의 세계. 명숙과 사랑을 나누기전 내가 살던 익숙한 세계이다.
그리고 명숙과 사랑을 나눌때 잠깐 살았던 감각과 몸의 세계. 그 시절에는 하루하루가 충만했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도 향긋한 명숙의 살내음도 거대한 파도처럼 나의 감각세포를 일깨웠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숨쉬었다.
도무지 현실같지 않았던 그 천상의 세계에서 예정대로 나는 추락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은 내가 비겁했기 때문이다. 여지껏 내가 쓴 에피소드에 그 늬앙스를 잘 녹여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명숙과의 끝을 사실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리고 내가 비겁한 선택을 하리라는것도.
평행세계의 또다른 나를 가끔 상상한다.
그 겨울날 편의점 문을 열고 나의 어머니가 들어오는 그 시퀀스. 그 시점에서 나는 항상 퍼즈를 건다. 그리고 다짐을 한다. 명숙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기로. 절대 손을 놓치 않기로. 나는 어버버 변명을 하지않고 나의 어머니에게 똑똑히 대답한다. 이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이고, 이 여인과 헤어지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릴거라고. 여기까지 상상하면 항상 나는 ‘핍진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렇게 용기있게 말하는건 내가 아니다.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기에 살아있지만 또한 죽어있다.
“x팀장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앞에있는 선배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 아닙니다”
“쯧쯔. 하여간 너는 가끔 그렇게 나사빠진 사람처럼 굴데가 있어. 지금 내말 안듣고 있었지?”
“새로운 프로젝트 말씀이십니까? 그거 원래 p팀장이 하기로 했던거 아닌가요?”
“그게 갑자기 p팀장이 새 프로젝트에 들어갔어. x도 알고있지? 그 프로젝트 잘되면 이번 분기 우리 회사 최대 성과야. 더군다나 상대는 T라고. 윗사람들이 실력 좋은 에이스 내보내야 한다고 성화야. 클라이언트도 p를 원한다고…”
양심은 있는지 내 직장 상사는 말끝을 흐렸다.
실력이라고? 그동안 p가 올린 모든 성과의 실무를 담당한게 나인데.
명숙과 헤어진뒤 나는 다시 활자와 관념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 지옥에서 버티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관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매트릭스에서 퍼즐놀이하기. 그게 초라한 현실을 잊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입사초기부터 일에 빠져 살았다. 주변에서 ‘인조인간’ 이라고 부르거나 ‘소시오패스’ 라고 수근댄다는건 알고있다.
그러나 알게뭐람? 나도 다 살려고 이 짓을 하고 있는거다 이것들아.
“알겠습니다. 쓸만한 사람들이나 몇명 붙여주세요“
”그게 말이야…“ 상사는 다소 멋쩍은듯 말을 이었다.
”이거 돈 안되는 프로젝트라고 신입이랑 인턴을 붙이라네. 쩝… 어쩌겠어… 이 판국에 내가 믿을게 너밖에 더있냐? 나도 알아. 광은 p가 다 팔고 있는거. 그렇지만 어쩌겠어. 정치도 실력이야“
가뜩이나 내가 맡고 있는 다른일도 많은데 나에게 패전처리를 시키는 선배나 돈 되는 일만 찾아나서는 p나 정말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자네도 알지? 이거는 시나리오가 다 된 케이스야. 회사 입장에서는 잘 지는 게임도 중요해. 패전처리도 실력이 있어야 맡긴다고. 더군다나 신입이나 인턴 교육으로 이만한 케이스가 없으니까 자네가 잘 가르쳐봐“
한숨만 나왔다. 물론 내가 나의 성과를 인정해 달라는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떤 평가를 받던지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에게 좀 더 흥미로운 퍼즐이 필요할 뿐이다. 잠깐이나마 이 고통을 잊을만한 나만의 도피처.
그리하여 짬처리, 설겆이, 패전처리투수, 호구.
나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나의 목록에 업무하나가 또 추가됐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의 인턴들이 인사를 했다. 남자하나 여자하나.
”이게 다입니까? g는요? 그 친구가 메인 아닌가요?“
나는 두 인턴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그게… g선배께서 일단 저희한테 내용 살펴보고 쟁점 정리하라고 맡겼습니다. g선배는 다른 업무가 있으시다고….“
갑자기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g의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 새끼가 나를 도대체 뭘로보고.
또다른 회의실에 있던 g가 서둘러 나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아 그게 선배님. 저 이번에 j팀장님 프로젝트에 들어간거 아시잖아요. 그게 좀 어렵고 복잡해서 그거 먼저 하고 이 케이스 챙기겠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올해 진짜 중요한거…“
비굴한 웃음을 흘리는 g는 인턴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인턴때 회식자리에서 내가 g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너는 성공하겠다.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눈치 빠르고 얼굴 두꺼워야돼.“
나는 악담이라고 생각하고 직구 던진거였는데, g는 성공하겠다라는 말에만 꽂혔는지 혀 꼬인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라고 말했었다.
인턴 a와 b는 같은 학교 동기라고 했다.
남자인 a는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머리에 바른 기름이 8학군 출신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반면에 b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구두를 신은 다소 수수한 차림의 여성이었다.
“둘중에 누가 더 성적 좋아요?”
내가 묻자 a가 수줍은 듯 손을 들었다.
“내용 정리해서 쟁점별로 정리된거 봤어요. 잘했어요. 이대로 디테일만 정리해서 시나리오 쓰면 될거 같아요. 내가 큰 틀은 잡아서 정리할테니까 여러분들이 완성만 좀 해줘요“
하고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그때 b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팀장님! 아 죄송합니다. 아! 아! 제가 보기에는 이 시나리오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큰 틀에서 우리의 시나리오는 너무 수세적입니다.“
이후 당당하게 논리를 이어간 b의 주장은 판을 뒤집자는 당돌한 것이었다. 나는 그 b를 보며 잠시 기시감이 들었다. 나도 선배들에게 이렇게 보였을까?
”b씨. 내가 만약에 b씨 지도교수고, 이 상황이 시험문제라면 나는 b씨한테 A를 줄거에요. 그런데요 지금 이거 실전이에요. 지금 b씨가 열심히 교과서 들여다 볼 시간에 왜 여기 나와서 인턴하지요? 교과서에 없는 실무 익히려고 나온거 아니에요? 무슨 말이지는 알겠는데, 이번판은 잘 져야되는 판이에요. 우리는 지금 저쪽 한테 5골 먹혔어요. 여기서 심판 멱살 잡아서 이 게임 무효다 라고 할게 아니라 상대 빈틈 노려서 한골이라도 더 넣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겁니다. “
내말에 b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나가려는 나를 붙잡은건 또다시 b였다.
”저 팀장님! 비유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할일은 1골이라도 더 넣는게 아니라, 상대가 넣은 5골이 골이 맞는지를 다투는게 더 맞는 표현인것 같습니다“
하아. 당돌하네. 내가 그걸 모를거 같나?
a가 난처한 표정으로 b를 제지하려 들었다.
나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맞아요. 제가 비유를 잘못했네요. 저는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해서요. 자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아시겠네요. 세상의 어떤 단단한 논리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 헛점이 있다는거는 알지요? 어디가 성긴데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파훼법까지 덧붙여서 보고해봐요. 두 분 다 똑똑하신거 같으니까 실무업무까지 한번 해봐요. 시험친다 생각하시고… 잘하면 내가 평가 후하게 줄께요”
돌아서는 나를 향해 b가 우렁차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며칠후 a와 b가 만든 보고서를 읽고 회의를 하기위해 내 방에 모여있던때였다.
머리아픈 말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b가 창밖을 보다가 넌지시 혼잣말을 했다.
”어? 눈오네“











